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문단 편집) === 그 외 === 전쟁 중 왕가로부터 하사받은 강아지 두 마리를 각각 '히틀러'와 '롬멜'로 이름붙였던 일화로 유명하다. 엄격한 금욕주의자로 한평생 [[술]][[담배]]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술의 경우는 아예 [[알쓰]] 수준이었다는 듯. 오죽했으면 오마 브래들리가 마켓 가든 작전을 입안한 몽고메리를 보고 '술을 전혀 못하는 그가 인사불성으로 취해 걸어왔다고 해도 그보다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영국인답게 차는 좋아하여 꼬박꼬박 마셨다. 술담배를 즐긴 [[윈스턴 처칠]] 총리와 이걸 가지고 대화한 적도 있다. 몽고메리가 "수상 각하, 저는 평생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시고, 담배 한 개비도 피운 적이 없어서 늘 건강합니다."라고 말하자, 처칠은 "장군. 나는 매일 이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고 위스키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지만 이렇게 건강하다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그리고 몽고메리 장군이 88세, 처칠 수상은 90세까지 살았으니 오히려 처칠이 몽고메리보다 더 오래 살았다. 그리고 성격은 그야말로 '''괴팍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하고 언쟁이 붙으면 마치 사냥개처럼[* NGC <전쟁의 대가들 - 몽고메리 대 롬멜>]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며, 당시 영국 정계에서 성격이 가장 나쁜 것으로 유명했던 [[윈스턴 처칠]] 수상조차 포로가 되어 몽고메리 장군과 잠시 이야기하게 된 [[빌헬름 리터 폰 토마]] 장군[* 1891.9.11.~1948.4.30. 1912년 바이에른 왕국군에 임관하여 1차 대전에 참전, 솜 전투 등 격전을 치르며 2급, 1급 철십자 훈장 및 막스 요제프 십자장을 수훈하였고,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도 잔류한 엘리트 장교이다. 차량화 전술에 대해 깊이 교육받은 지휘관으로서 그는 스페인 내전, 폴란드 침공, 1941년의 동부 전선을 거쳐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원수의 부하 지휘관으로 종군하였다. 비록 상관과의 사이는 좋지 못했으나 헌신적인 지휘관으로서 토마는 병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몽고메리의 총공세에 의해 아프리카 집단군이 와해 위기에 놓인 1942년 11월 3일, 토마는 히틀러의 후퇴 중지 및 현 위치 고수 명령에 반발하며 자신의 기갑군단 사령부에서 예비 전차 1량을 몰고 나와 전장의 병사들에게로 달려갔다. 전차가 여러 발의 포탄에 피격되며 그는 경상을 입었고, 결국 이튿날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 처칠 경의 걱정대로 토마 장군이 몽고메리 원수와 이야기하며 괴로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몽고메리는 토마 장군의 영국군에 대한 이해도가 자기 생각보다 훨씬 깊음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후 토마는 영국군의 포로로 지냈으며, 1948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최종 계급은 국방군 육군 기갑대장.]을 "성질 고약한 몽고메리와 이야기하게 됐다"고 동정할 정도였다. [[마티니]]의 바리에이션 중에 몽고메리라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진과 베르무트를 15:1로 한 것인데 헤밍웨이도 마신 바리에이션이라고 한다. 이름의 유래가 몽고메리 장군은 자기병사 대 적의 비율이 15:1이어야 싸울거라고 하는 비아냥으로 만든 바리에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몽고메리 자작은 손자까지 3대가 이어지고 있으나, 현재 자작인 1954년생 손자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다.] 방계로 이을 형제나 사촌 역시 없기 때문에 3대에서 끊어질 예정이다.[* 몽고메리 자작위는 1대 자작의 직계 남성 후손만 세습이 인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